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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2.15 오사카 여행 셋째날, 텐노지 1
여행2013. 2. 15. 00:47

전날 많이 걸어 피곤했던지, 8시 45분에 일어났다. 부랴부랴 아침을 사러가기 위해 게스트하우스 앞 슈퍼로 갔다.

개장시간이 9시라며 출입을 금했다. 이렇게 융퉁성이 없어서야. 살짝 짜증났다. 원칙이란 늘 이렇게 양면성이 있다.

확고하지만 답답한. 무튼 그 슈퍼 법이 그러니, 대충 씻고 다시 왔다. 아침부터 도시락 냄새로 한켠이 기름지다.

놀라운 것은 제법 푸짐하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편의점 도시락은 성인 남성 기준, 부족한데 일본 도시락은 반찬수,

양, 질까지 제법 괜찮다. 가격도 380~500엔 사이니깐 합당하다. 그렇게 배를 채우고 오전 일정을 시작했다.

여자들은 전일 허기진 쇼핑을 채우기 위해, 남바로 갔고. 나는 텐노지로 향했다. 일본 역사에 큰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다.

내게 쇼핑은 크게 무의미 했기 때문이다. 게스트하우스가 위치한 모모다니역에서 텐노지까지는 2정거장. 걷기로 했다.

차비를 절약하기 위함은 아니다. 걸으면 더 자세하고, 많이 볼 수 있다는 경험 때문이다. 스마트폰으로 캡쳐한 지도를 꺼냈다.

대략 갈 방향과 시간을 계산했다. 아무리 오래 걸려도 50분이면 족히 닿을 거리다. 자신감 있게 발을 떼었다.

내가 좋아하는 여행에 관한 문구가 있다. 임어당 <생활의 발견> "여행이란 오라는 데는 없지만, 갈 데는 많다." 라는 경구다.

얼마나 자유스러운가? 그리고 또 겸손한가. 이 말의 의미를 걸은 지 20분도 채 안 돼 다시 실감했다. 걷다보니 큰 운동장이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길래 뭘 하나 궁금해 다가갔다. 정구를 하고 있다. 정구는 야구와 달리 던지는 폼이 별로다.

촌스럽다. 격하게 말하면 쫌 후지다. 이 젊은 사람들이 야구를 할 거면 할 것이지, 짜세 안 나게 정구가 모람? 그래도 궁금해

하는 양을 지켜봤다. 정구 룰은 잘 모르지만 투수의 던지는 폼 빼면 야구와 크게 다를 게 없는 것 같았다. 제법 신기하다는

듯 보다 심판의 소리에 깜짝깜짝 놀랐다. 그는 동네 야구에서 진짜(?) 심판을 보고 있었다. 대충 설렁설렁 웃어가며 봐도

될 심판을 자세하나, 목소리하나 다르지 않게 마치 정규시합 심판처럼 행동했다. 언뜻 보기에 허세 같아 웃기지만 그에게서

프로의식이 느껴졌다. 작은 것을 하더라도 열심히 한다. 내게 주어진 것이라면 최선을 다한다. 이런 생각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흔히 꼽는 일본 민족 특징 중 하나가 장인정신인데, 이러한 모습이 국민 개개인에 깊숙히 관여 돼 있다는 것을 보니 놀라웠다.

그래서 음식 하나 만들더라도 최선을 다 하고, 물건 판매 시 친절을 다 하는구나.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에만 최선을 다 했다.

심지어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도 때로는 편하게 하려고 꾀 부리고 모른척 눈 감기 일쑤였다. 그런 내 모습과 심판을 비교하니

부끄러웠다. 비록 한 때의 작은 깨달음이지만 일본 여행 속 큰 기억으로 자리 남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발 걸음을 뗐다. 내 주변의 큰 건물명과 지도에 새겨진 글씨를 비교해 가며 목적지에 다다랐다. 살짝 뿌듯했다.

원래 새해를 맞아 텐노지에서 팥을 뿌리는 행사를 한다고 했는데 취소됐다. 뭐 크게 아쉬움은 없다. 절 내부로 들어갔다.

절의 역사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다. 무지했기 때문이다. 그냥 일본 절이 어떤지 경험삼아 왔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일본 불교도 기복신앙 성격이 강한 것 같다. 다들 그렇게 무엇을 빌러 왔는지, 내가 처음 텐노지에 발을 들여서 본 것과

마지막으로 나갈 때 본 것 모두 제(祭) 였다. 동쪽 문으로 들어와 비석무덤(?)을 지나니 첫번째 제의 현장에 다다랐다.

사진 촬영이 금지 돼 찍지는 못했다. 방문객들이 조그만 종이에 무엇을 써서, 승려옷 입은 사람에게 주면 그들은 그것을 받아

약수물위에 뛰우며 모라고 한다. 그래, 사람들의 염원이 신성한 물위를 흘러, 그들이 바라는 곳으로 닿길 바라는 의식이구나

이해했다. 그런데 여기서 퀘스쳔 하나. 이렇게 빌면 현실이 달라질까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기복신앙이 비는 사람의 소망에

대한 관여도를 높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했다. 실제로 이렇게 먼 곳까지 시간과 돈을 드려 원하는 바를 강하게 인식시키면

그렇지 않을 때 보다 행동이 따르지 않겠나 하는 점이다. 다만 한 가지, '바램'에 대한 적당한 댓가를 치뤘으니 하는 안일한

생각만 없다면 기복신앙 자체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곳은 귀정당(龜井堂)이라 불리는 조그만

연못으로 돌거북이가 물을 뿜고 사람들은 그 물을 극락과 이어진 샘이라 여기며, 사자의 이름을 쓴 종이를 띄어 명목을 빈다.)

두 번째 제의는 육시당에서 어떤 승려가 역시 아까 봤던 비슷한 종이를 받아 불로 태우는 것이다. 제법 의엄 넘치며 웅장했다.

뭘 비는 지는 역시 모르겠다만, 이 역시 비는 사람의 바람이 하늘에 닿기를 바란다는 뜻 같았다. 내가 볼 때 지극히

경망(?)스러운 행동이 무엇으로 하여금 참여한 사람에겐 큰 의미일까? 내가 불로 태우면 사기고, 왜 승려가 태우면 의식일까?

나는 그것이 권위가 주는 신뢰라고 생각했다. 그 권위란 옛날에 대중들이 뭣도 몰랐을 때는 신에게서 받은 계시로 포장하면

통했다. 문자 보급 후에는 '지식'이 계시를 대신해 종교인들의 권위를 세워줬다.(근대까지 일반 백성들의 문맹을 감안할 때)

그러면 요즘에는 무엇이 종교인들의 권위를 세워줄까? 종교인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도 많고, 성서에 언급된 신비한 영적능력이

과학으로 검증 불가한 오늘 날. 종교인을 종교인 답게 만드는 근원적 힘을 무엇일까? 나는 그 답을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안고

있는 정신병에서 찾았다. 경쟁일변도의 '피로사회'에서 지친 일반 대중들은 영적 힐링이 필요하다. 그것을 도와줄 수 있는 게

종교인들의 지혜다. 마치 법정스님과 혜민스님의 최근 족적처럼. 종교인들은 대중의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지혜로 권위를

세울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본 제의는 중심가람에서 본 '곡'이다. 이 역시 무슨 종이를 받아들며 곡을 한다. 그 주변에 안 어울리게도 의자가

있다. 다른 곳은 다다미가 깔려있었거든. 노인분들이 의자에 앉아 곡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나도 좀 쉴겸 의자에 앉아

지켜봤다. 이 분들은 또 무엇을 비는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프란시스 베이컨의 "아이들이 어둠을 두려워하듯이 어름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남은 여생과 사후의 명복을 일찌감치 빌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Posted by 방배동외톨이